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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 (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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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모는 위나라의 황족으로, 254년 사마씨에 의해 황위에 올랐다. 그는 쇠퇴하는 위나라를 재건하려는 희망을 품고 사마씨의 전횡에 맞서려 했으나, 260년 사마소에게 대항하려다 가충에게 살해되었다. 조모는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지만, 사마씨의 권력 아래에서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죽음은 위나라 멸망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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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 (위나라)
기본 정보
조모
조모
칭호황제
작위고귀향공
조모(曹髦)
언사(彥士)
시호없음
묘호없음
출생241년
사망260년 6월 2일
출생지낙양
사인암살
아버지조림, 동해정왕
어머니미상
배우자변황후
통치 정보
통치 기간254년 11월 1일 ~ 260년 6월 2일
연호정원: 254년 ~ 256년
감로: 256년 ~ 260년
이전 통치자조방
다음 통치자조환
섭정사마사, 사마소
가계
왕조조위

2. 생애

254년, 조방이 폐위되자 조조의 아들인 팽성왕 조거와 함께 황제 후보에 올랐다. 조모는 조방보다 족보상 서열이 낮았지만 황제로 즉위했으며, 255년 황후를 간택하였다.[6]

조모는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사마사(司馬師)에 이어 사마소(司馬昭)가 정권을 장악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조모는 늘 조조를 존경하며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조조에 대해 자주 물었다고 한다.[6] 종회는 조모를 "재능은 조식과 같고, 무용은 조조와 닮았다"라고 평가했으며, 석포는 조조의 환생이라고 극찬했다.

사마씨의 횡포가 심해지자, 제갈량의 일족인 사공(司空) 제갈탄이 수춘(壽春)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의 권신 손침이 이를 지원하는 등 국내외로 혼란이 있었다.[6] 이러한 상황에서 조모는 잠룡시(濳龍詩)를 쓰며 사마씨의 권력을 비판하였다.

감로 5년(260년) 5월 7일, 조모는 측근인 왕침, 왕경, 왕업에게 "사마소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다 알고 있다(사마소지심, 노인개지야). 짐은 이대로 폐위의 치욕을 받을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 조모는 궁중의 숙위, 창두, 관동 300명을 모아 사마소를 치려 했지만, 운룡문 앞에서 사마소의 심복 가충(賈充), 성쉬, 성제의 습격을 받고 성제의 창에 찔려 죽었다.[6]

사후 사마소에 의해 조환이 다음 황제로 옹립되고, 사마소는 성쉬와 성제, 왕경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했다.[6] 조모는 문황제 조비의 손자이며, 동해정왕 조림의 아들이다.

조모는 쇠퇴하는 위나라를 재건할 희망을 품고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했다. 16세 때 과거 제왕과 황제의 우열에 대해 순의 등과 논했는데, 조모는 멸망 직전의 하나라를 재건한 소강을 높이 평가했고, 신하들은 한나라고조를 추천했다. 조모는 왕침, 배수, 사마망, 종회 등과 동어전에서 자유로운 토론회를 열고 문학론을 썼다. 성급한 성격으로 사람을 소집할 때는 즉시 오기를 바랐는데, 사마망은 궁중 직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추봉차와 호분의 병졸 5명을 주었다.

사마소가 추대되는 형태로, 황태후와 함께 친정하여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했다. 여러 신하들은 조모를 알현할 수도 없었고, 실권은 사마씨에게 돌아갔다. 이 무렵, 우물 안에서 이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잇따르자, 조모는 길조라고 생각한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용은 군주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늘에 있지 않고, 밭에도 없는 것은 좋은 징조라고 할 수 없다"라고 부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덕이 없음을 풍자한 『잠룡』이라는 를 지었고, 사마소는 이것을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2. 1. 즉위 과정

254년, 조방사마사에 의해 폐위되자, 조조의 아들인 팽성왕 조거와 함께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다.[2] 족보상 서열이 낮은 조모가 황제로 즉위하였고, 255년 변황후를 간택하였다.[6]

사마사조비의 동생인 조거를 새로운 황제로 세우겠다고 알리자, 조방의 계모인 곽태후는 조거가 그녀의 남편 조예의 삼촌이므로, 그러한 계승은 부적절하며 조예는 사실상 후계자가 없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사마사는 조모를 황제로 세우는 것에 동의했다.[2]

13세의 어린 나이에도 조모는 지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고, 곽태후는 그가 다른 왕자나 공들 중에서 사마씨에 대항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2] 사마사가 곽태후에게 옥새를 요구하자, 그녀는 이전에 조모를 만난 적이 있으며 옥새를 직접 넘겨주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다.[2] 조모가 수도로 소환되었을 때, 즉위하기 전까지 황제의 위세를 드러내지 않고 공에게 어울리는 의례를 따랐다. 이는 겸손한 젊은 황제라는 대중의 지지와 칭찬을 얻게 했다.[2]

진서경제 기에 따르면, 조방이 폐위된 후, 사마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곽태후가 조모를 황제로 옹립했다고 한다.

2. 2. 즉위 초, 사마씨의 전횡과 조모의 노력

조모는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사마사(司馬師)에 이어 사마소(司馬昭)가 정권을 장악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조모는 늘 조조를 존경하며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조조에 대해 자주 물었다고 한다.[6] 종회(鍾會)는 조모를 "재능은 조식(曹植)과 같고, 무용은 조조와 닮았다"라고 평가했으며, 석포는 조모를 조조의 환생이라고 극찬했다. 조모는 쇠퇴하는 위나라를 재건하려는 희망을 품고 즉위하였고, 여러 신하들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멸망 직전의 하나라를 재건한 소강을 높이 평가했다. 왕침, 배수(裴秀), 사마망(司馬望), 종회 등과 동어전에서 자유로운 토론회를 열고 문학론을 썼다. 조모는 사마망, 왕침, 배수, 종회 등 문학적 재능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주변에 두었는데, 이들은 사마씨를 지지했지만 조모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55년, 관구검문흠이 수춘에서 사마씨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마사의 군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관구검은 살해되었고 그의 일족은 몰살당했으며, 문흠과 그의 아들 문앙, 문호(文虎)는 동오로 도망쳤다. 사마사가 반란 진압 직후 병으로 사망하자, 14세의 조모는 정권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조모는 사마사의 후계자인 사마소에게 수춘의 상황이 아직 완전히 평화롭지 않다는 핑계로 허창에 머물도록 조서를 내렸다. 또한 사마소의 조력자인 부구에게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돌아오도록 소환했으나, 부구와 종회의 조언에 따라 사마소는 조서를 무시하고 낙양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정부를 장악했다.

257년, 제갈탄이 관구검을 대신하여 수춘의 군사령관이 되었고, 동오의 지원을 받아 사마소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258년 초, 사마소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여 반란군을 도시에 가두었다. 수춘에서는 제갈탄과 문흠(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동오에서 돌아옴)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고, 문흠은 제갈탄의 손에 죽었으며 문흠의 아들들은 사마소에게 투항했다. 수춘은 결국 사마소의 군대에 함락되었고 반란은 효과적으로 진압되었다.

2. 3. 수춘에서의 반란과 잠룡시

사마씨의 횡포가 심해지자, 제갈량의 일족인 사공 제갈탄이 요충지인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의 권신 손침이 이를 지원하는 등 국내외로 혼란이 있었다.[6]

이런 상황에서 조모는 잠룡시를 지어 사마씨의 권력을 비판했다.

255년, 장수 관구검문흠이 수춘에서 사마씨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마사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관구검은 살해되었고 문흠은 동오로 도망쳤다. 사마사가 죽은 후, 14세의 조모는 정권을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사마소는 조서를 무시하고 낙양으로 돌아와 정부를 장악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조모는 사마망, 왕침, 배수, 종회 등 문학적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어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는 종종 그들과 회의를 열어 문학을 논했고, 사마망에게는 빠른 마차와 황실 경호원을 주었다.

257년, 제갈탄이 동오의 지원을 받아 사마소에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소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으며, 258년에 수춘을 함락시켰다. 259년, 조모는 두 개의 우물에서 황룡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잠룡시'를 지었다.

:'불쌍한 용은 갇혀, 외롭고 춥다;'

:'그는 깊은 곳에서 뛰어 나올 수 없다;'

:'그는 하늘로 솟아오를 수 없다;'

:'그는 심지어 밭으로 내려갈 수도 없다.'

:'불쌍한 용은 깊은 우물에 빠졌다;'

:'심지어 메기도 그 앞에서 춤춘다;'

:'그는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나 또한 이만큼 우울한가?'

이 시는 사마소를 불쾌하게 했고, 그는 조모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258년, 사마소의 압력으로 조모는 구석을 하사하는 조서를 내렸지만 사마소는 거절했다.

조모는 쇠퇴하는 위나라를 재건할 희망을 품고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과 논쟁하는 것을 좋아했다. 16세 때 과거 제왕, 황제의 우열에 대해 순의 등과 논했는데, 조모가 높이 평가한 것은 멸망 직전의 하나라를 재건한 소강이었고, 신하들이 추천한 것은 한나라고조였다. 논쟁에서 이겼다는 기록이 있지만, 위나라의 쇠퇴를 막는 데는 실패했다.

조모는 왕침, 배수, 사마망, 종회 등과 동어전에서 자유로운 토론회를 열고 문학론을 썼다. 성급한 성격으로 사람을 소집할 때는 즉시 오기를 바랐는데, 사마망은 궁중 직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시 올 수 없어서 특별히 추봉차와 호분의 병졸 5명을 주었다.

사마소가 추대되는 형태로, 황태후와 함께 친정하여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했다. 여러 신하들은 조모를 알현할 수도 없었고, 실권은 사마씨에게 돌아갔다. 이 무렵, 우물 안에서 이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잇따르자, 조모는 길조라고 생각한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용은 군주의 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늘에 있지 않고, 밭에도 없는 것은 좋은 징조라고 할 수 없다"라고 부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덕이 없음을 풍자한 『잠룡』이라는 를 지었고, 사마소는 이것을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2. 4. 사마소와의 갈등 및 최후

260년 5월경,[3] 조모는 사마소에게 진공의 작위와 구석을 수여하는 조서를 내렸으나, 사마소는 이를 여러 차례 거절하여 조모를 분노하게 했다. 조모는 측근인 왕침, 왕경, 왕업을 불러 사마소에 대항하여 권력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왕침과 왕업은 사마소에게 이 사실을 밀고했다.

조모는 직접 칼을 들고 친위대를 이끌고 궁궐에서 나와 사마소를 공격하려 했다. 사마주가 성문에서 방어했지만 격퇴당했다. 가충은 남쪽 망루에서 또 다른 방어를 이끌었고, 부하 성제에게 조모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성제는 창으로 조모의 가슴을 찔러 살해했다.[6]

결국, 사마소는 실행범인 성제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삼족을 멸했다. 창도공 조황(후일 조환)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고, 그는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266년 2월에 위나라 왕위를 찬탈하기 전까지 위나라의 마지막 허수아비 황제였다.

2. 5. 사후 처리

사마소는 조환을 다음 황제로 옹립하고 성쉬와 성제, 왕경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했다.[6] 사마소는 곽태후에게 조모가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조서를 발표하게 하고, 조모의 작위를 박탈했다. 사마소는 숙부 사마부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모를 서민의 예로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사마부의 간언으로 왕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조모의 암살 소식을 들은 태부 사마부와 상서 복야 진태는 조모의 시신을 무릎에 얹고 곡례를 치렀다. 사마소는 진태에게 가충을 요참에 처하는 것 외에는 천하에 사죄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3. 연호

연호기간사용 횟수
정원254년 ~ 256년3년
감로256년 ~ 260년5년


4. 가계

曹髦중국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부: 동해왕 조림
  • 모: (알 수 없음)
  • 황후: 변황후


당나라 예술가 조패는 조모의 후손이었다.[4]

5. 평가

조모는 사마씨의 전횡에 맞서 황실의 권위를 되찾으려 한 마지막 황제였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은 높이 평가되지만, 성급한 성격과 부족한 준비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6]

진수(陳壽)는 조모의 죽음에 대해 "(崩)"이 아닌 "졸(卒)"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사망 장소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태의 비정상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4] 이는 황제의 죽음에 즈음하여 사망 월일과 함께 장소를 명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작법임에도 불구하고, 조모의 죽음이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한국에서는 조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조모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6. 기타

당나라의 화가 조패는 조모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
[2] 서적 Empresses and Consorts: Selections from Chen Shou's Records of the Three States With Pei Songzhi's Commentary University of Hawaii Press
[3] 문서
[4] 서적 先秦漢魏晉南北朝詩 中華書局
[5] 뉴스 曹操の70代目子孫と称する男性…DNA鑑定の結果は「肯定的」 http://www.chinanews[...] 中国新聞社 (中華人民共和国) 2011-11-04
[6] 문서 삼소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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